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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사회

(1장, 정의의 집)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by YBK note 2020.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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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금)에 책을 구매했습니다. tvn의 《책을 읽어드립니다》에서 설민석 강사가 소개를 해준 적도 있는데, 그때 흥미가 생겨서 한 번 제대로 읽어보기로 결심했죠. 물론 한나 아렌트와 아이히만에 대해 모르던 것은 아니었으나 깊이 알지는 못했기에 굉장히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제 2의 아이히만이 되지 않기를."

통상, 나의 블로그에서는 전체 책을 다 읽고서 생각이나 소감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 책은 각 장별로 제대로 이해하는 것부터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각 장별로 정독하여 소감 및 생각을 정리하고 나중에 전체적으로 종합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의 이해를 위해 유튜브 해설이나 다른 사람들의 소감들도 참고해보려고 했으나, 대부분 위키피디아, 나무 위키 등에 중복된 내용들이 많아 큰 도움은 안됐습니다.

 

책은 총 15장(정의의 집 ~처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학술적인 저술이 아닌 대중을 위한 책이었다고는 하나, 내용의 서술 자체만 놓고 봤을 때 이해하기가 너무 힘든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문단 별로 읽고, 그 문단의 내용을 정리하고 앞뒤의 문맥을 잘 정리해야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것의 본질을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죠. 사실 "대중을 위한 책"의 내면에는 뉴욕 지식인들이라는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은 제1장 정의의 집에 대한 내용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 (재판단 구성)

일단, 제1장을 읽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해이다. 이것을 정리하지 않고, 책을 읽으면 1장이 끝날 때쯤에 다시 처음부터 돌아가서 읽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인물들의 이름과 관계를 명확히 인지한 상태여야 한다.

다비드 벤구리온 : 이스라엘의 수상, '모사드'를 통해 아르헨티나에서 아이히만을 납치하여 재판 시장
모셰 린다우 : 주심판사
베냐민 할레비 : 배석판사 1
이착 라베 : 배석판사 2
기드온 하우즈너 : 법무장관이자 기소 담당 검사(폴란드 사람)
야홉 바오르 : 검사 2
가브리엘 바흐 : 검사 3
아돌프 아이히만 : 피고인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 : 아이히만의 변호사(독일인) / "세르바티우스 박사"

책에는 따로 설명이나 명시가 된 부분이 없지만, "기드온 하우즈너(법무장관, 기소 담당 검사)"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독일 사람이며, 이들 가족 모두 2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이스라엘로 가족들을 이주시켜 희생된 가족이 거의 없었다는 부분은 분명히 주목해야 할 부분인 것 같다. 또한 하우즈 너는 검사이지만, 법무장관이며, 벤구리온(재판을 준비)에게 절대 충성하는 사람임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이미 벤구리온 수상이 "쇼와 같은 재판"이라는 콘셉트로 준비를 했다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이런 사람들로 재판단을 구성한 것"① 유대인 학살에 대한 보복이라는 비난을 피함"과 동시에 "② 독일어에 능통한 하우즈너를 통해 재판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법정의 모습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아이히만의 악마와 같은 모습에 대해 초점을 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600만이라는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있어서 "최종 해결책(The Final Solution)"을 계획 및 이행하는데 정점에 있던 사람이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제1장에 대해 서술하기에 앞서 저는 글의 제목을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하였습니다. 

피고를 납치해서 재판장에 앉혀놓고, 공정한 잣대에 의해 심판한다고 하는 것이 과연 정의인가?

이 질문을 하고 난 다음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정의롭지 않은 행위(납치)를 통해 아이히만을 예루살렘에서 재판(사형)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단지 600만의 유대인의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한 사람을 납치해서 사형을 한 것이라면 이것인 국제적으로 분명히 잘못된 방법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도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유가 도대체 뭐지? 납치를 해서 재판장에 앉혔고, 전 세계 동시 방송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일까? 


재판의 목적

 

"이 소송사건은 아이히만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이 무엇을 겪었느냐를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다."

 

벤구리온 수상이 재판을 통해 전 세계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오직 이스라엘에서만 유대인은 안전하고 명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1948년 5월 14일에 건국된 이스라엘의 건국에 대한 정당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입니다. 정의롭지 않은 행위를 통해 실시한 재판의 목적은 시온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이스라엘 국가 설립의 정당성 확보입니다. 우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600만의 유대인의 학살은 오직 독일인(히틀러)에 의해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다. 

이집트 국가평의회에서 외무장관 후사인 줄피카 사부리가 진지하게 제시한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의 살육에 대한 죄가 없고, 시온주의자들의 희생자 들였으며, 시온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목표(이스라엘 국가의 창건)를 결국 달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범죄를 그(아돌프 아이히만)이 수행하도록 강요했다."

 

"내(여호와)가 너희들을 지나면서 너희들이 너희 자신의 피로 더럽혀진 것을 보았을 때, 내가 너희에게 너희 피 가운데 살아나라라고 말했다. (에스겔서)"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인종차별이나 유대인 학살 같은 것이 시온주의와 같은 것으로 재현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재현은 우리 주변의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바로 "악의 평범성"인 것 같다. 아렌트는 이야기한다. "정의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정의는 은둔을 요구하고, 분노보다는 슬픔을 허용하며, 그 자신을 주목받는 자리에 놓음으로써 갖게 되는 모든 쾌락을 아주 조심스럽게 피하도록 처방한다."

 

예루살렘에서의 정의(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 확보)는 신변 보호를 위해 유리 부스 안에 있는 아돌프 아이히만에 집중한다고 한다. "아이히만이 어떠한 인종차별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은둔과 "유대인의 학살"이라는 슬픔에 주목하고, "아이히만을 재판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이스라엘이 받을 수도 있었던 비난의 화살을 자연스럽게 아이히만으로 돌린다.

이것이 과연 예루살렘의 정의인가?


재판의 한계

"이 역사적 재판의 심판대에 서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아니고 나치 정부도 아니며, 바로 역사 전체에 나타나는 반유대주의이다." 하지만 심판대 위에는 한 개인, 살과 피를 가진 한 인간(아이히만)이 앉아 있었다. 아이히만은 유리보호대 속에서도 보이며, 이 재판의 주관자인 벤구리온은 막후 진행자로 법정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떠올렸을 때, 우리가 오직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마와 같은 계획, 생각들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가지는 한계점임은 분명한 것 같다. 물론 아이히만을 통해 우리가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판단의 무능성"처럼 타인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능력이 이렇게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정의(Justice)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개인마다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국내도서
저자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 김선욱역
출판 : 한길사 200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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